'네 이웃의 식탁' 표지 [사진=민음사]

[월드투데이=강효진 기자]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의 초고가 1928년에 쓰였으니 현재는 그로부터 약 90여년이 지난 셈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소설 속 손상낙과 조효내는 맞벌이 부부임에도, 전은오와 서요진은 아내가 경제활동을 하고 남편이 가사일을 담당하기로 했음에도 아이를 보살피는 데에는 여성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지금껏 늘 돌봄받기만 했지 누군가를 돌보아본 적은 없었던 남성들은 돌보는 방법을 모르고, 알고 싶지 않아 한다.

백번 양보하여 집 안 꼴이야 남자아이 둘이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며 아무리 치워도 수습되지 않는 거실의 상태가 낯설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형제가 둘 다 감기 환자 3일 차인데 각자의 점심 저녁 2회분 약이 약국 종이봉투에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짜장 묻은 빨래부터 새로 돌리며, 애들을 보고 있으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느냐고 재강에게 물었을 때 재강이 보인 반응이 지금의 전은오와 같았다. 약은 몇 시에 무엇을 몇 밀리만큼 어느 용기에 부어서 먹이라고 일일이 써서 냉장고에 자석으로 박아 놓든지,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고 약을 먹여? 큰애랑 작은애랑 종류도 용량도 다를 텐데 모르고 덜컥 먹였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참을성 있게 설명해 줘야지 안 그러면 몰라.

 『네 이웃의 식탁』, 2018, 민음사, 76쪽.

지금 한국은 혼인률과 출산율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기는 하나, 실제로 사용하려면 상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또한 공립보다 사설 유치원이 많아 육아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기피한다. 특히 맞벌이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 노동에 시달려야 하며, 육아휴직이 불가능하여 퇴사를 하고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후에 사회생활을 재개하려고 하면 경력단절여성이 되고 만다. 그러면 젊은 날에 쌓아올렸던 커리어는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에는 저임금 노동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부 기업들에서는 여성 근로자들은 어차피 출산과 육아 때문에 휴직 또는 퇴직할 거라며 채용할 때부터 남성 지원자를 선호하기도 한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이처럼 돌봄노동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시대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정말이지 교원은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이즈음 환멸을 느꼈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품을 들였던 매순간의 노동과 의무가 10원어치의 의미도 없다고 선고받기란 쭉 있는 일이었으며, 일상에서 여산과 일가친척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교원은 스스로마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절박감에 살림과 육아를 더욱 밀도 있게 사수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는 누구나 부러워하며 좋아요 버튼을 클릭하는 각종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남았었다.

『네 이웃의 식탁』, 2018, 민음사, 136쪽.

육아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빠의 육아 참여에 대한 사회적 변화와 기대를 보여준다. ‘육아는 엄마가 도맡아 하는 것’이라는 젠더박스(gender box)를 깨고 서툰 솜씨로 아이를 돌보는 아빠들의 모습은 아이의 해맑음과 함께 보는 사람을 절로 흐뭇하게 만든다. 그러나 일반인이 TV 속 연예인 가족처럼 좋은 유모차를 끌고 유기농 식품을 먹이려면 강교원처럼 악착같이 아끼고 절약하여 ‘맘충’이라고 비하당하는 일도 감내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선물 따위도 용납되지 않는다.

남편이 신통치 않게 벌어다 주어도 편안한 승차감으로 아이의 척추를 보호하는 영국산 유모차를 시중의 절반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중략) 아이가 요술부채를 너무 좋아하는데 제가 사정이 많이 어렵네요. 저렴하게 주시면 안 될까요. (중략) 누군 뭐 호화롭게 잘살아서 제값 주고 구입하나요. 다들 허리띠는 기본으로 졸라매요. 이 쪽지 캡처는 다른 게시판으로 퍼 날라져서 ‘반도의 흔한 중고나라 거지맘’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포털 사이트 멤인 화면 게시판에도 올라갔다.

 『네 이웃의 식탁』, 2018, 민음사, 139-141쪽.

결국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네 가구는 독박육아와 이웃집 남성의 추근거림, 공동체 의무에의 강요 등으로 인한 갈등 끝에 세 집이 떠나가고 뒷마당의 원목 식탁처럼 견고했던 그들의 희망은 파국을 맞는다. 결말은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악취만 진동할 뿐이라는 작가의 디스토피아적 경고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유토피아에 불과했다. 치솟는 집값과 저출산,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살 집을 제공하고 공동체 생활과 출산의 의무를 부과해버린 임시방편의 한계다. 한 가정의 식탁에 저녁 밥상이 올라오는, 그리고 가족이 둘러앉아 그 밥을 맛있게 먹는 무사한 일이 매일 일어나기 위해 안과 밖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온 마음을 다한 돌봄의 가치는 과연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인지 작품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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